알코올중독이라는 병을 알코올의존이라고 정의한다. 술 없이 살 수 없게 사람, 알코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을 알코올의존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가족 역시 공동의존자라고 한다. 왜 그럴까? 간단하고 쉽게 설명한다. 공동의존증을 <도우려는 중독>이라고 한다. 무엇을 도우려고 하다 그것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6순 노모가 계셨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실제 사건이다. 그녀는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인 아들을 힘겹게 길러왔다. 아들이 성년이 되고 자기 앞을 가릴 만큼 성장하자 이웃의 소개로 성정이 곱고 참한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다. 며느리는 남편에게는 물론 시어머니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게 사이좋던 고부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시어머니는 젊은 부부가 한 이불속에서 자는 것마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잠자리까지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들 부부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아들 방문 앞 쪽마루에 앉아 헛기침을 콩콩 해대며 새벽까지 잠자리를 방해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예뻐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며느리가 왜 그렇게 미워졌을까? 답은 하나, 노모는 도우려는 중독증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유복자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 남편 대신 유복자 아들과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중심에는 오직 그 아들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어린 아들은 금방 죽을 것만 같았고 자신이 없으면 아들은 살 수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삶은 온통 아들을 위한 삶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아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맞이하자 그녀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의 목적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숫물을 준비해 주고 얼굴을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수건을 건내 주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출근복을 입혀 주고, 퇴근하면 저녁 식사는 자신의 식성은 무시하고 아들 입맛에 맞추어 저녁상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 때 이부자리를 펴주고, 겨울이면 방바닥이 알맞게 더워졌나 요 밑에 손을 넣어 온기를 확인하는 등 그녀의 삶은 온통 아들을 돌보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일을 며느리가 대신하자 삶의 목적까지 사라진 것이었다.
아들을 위해 할 일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그녀는 이제 삶의 목적과 보람마저 허망하게 사라진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자 이제 며느리는 사랑하는 아들의 반려가 아니라 어머니인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가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모는 도우려는 중독증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도우려는 중독증의 증상은 알코올중독자들의 아내에게서도 나타난다. 내가 만난 두 친구는 절친으로 두 사람 모두 알코올중독자였다. 한 친구는 경동시장에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술 문제를 인지하고 내가 진행하던 회복 프로그램에 열심히 어렵게 단주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친구는 아직도 자신의 술 문제를 부인하며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술로 생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 친구는 아내가 알바로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친구가 그들 부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같이 생활하며 술을 끊도록 도우려 했다.
그렇다고 생활을 접고 그들에게만 매달릴 수 없어 친구의 아내에게 신신부탁을 하고 가게로 출근했다. 절대 집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또 절대 술을 먹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하라고,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자기도 더 이상 도울 수 없으니까 자기 집에서 나갈 각오를 하라고 엄포까지 놓고.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고 출근한 그는 집에서 가져올 물건이 있어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막 대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친구의 아내를 문 앞에서 맞닥뜨렸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황급히 치마 속에 감추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친구는 치마 속에 감춘 물건을 빼앗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술병이었다. 화가 머릿끝까지 치밀어오른 그는 친구의 아내를 호되게 질책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나도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는데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당신 남편을 그래도 친구라고 도와주려고 내 집에 잠시나마 같이 살게 하고, 그렇게 술을 못 먹게 하라고 당부했는데 직접 술까지 사다 주다니 이렇게 배신해도 되느냐?”고
친구의 아내가 울며 대답했다. 한 잔만 먹게 해달라고, 못 먹으면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딱 한 잔만 먹게 해달라고 울며 애원하는데 불쌍해서 어떡하는냐고.
친구의 아내도 남편이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술을 못 끊고 계속 마시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아보고, 실제 가출도 해보고, 울며불며 통사정도 해보고, 이도저도 안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도 시켜보았다. 그런 그녀가 알코올중독자 남편의 통사정에 자발적으로 술을 사다 먹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이런 현상은 중독자 가족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도우려는 중독증의 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예로 든 노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유형의 아내들은 자기가 돕지 않으면(도와서 술을 끊어주지 않으면) 남편은 곧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정신적 에너지도, 신체적 에너지 모두를 남편의 단주에 올인한다. 몰래 감추어 놓은 술을 수색하여 찾아내어 쏟아버리고, 술을 사지 못하게 집안에 돈의 씨를 말리고, 동네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외상 주지 말라 애원하고, 정신병원의 강제 입원도 수도 없이 반복하고. 그러나 이런 행동이 철저한 것은 아니다. 아이로니칼하게도 중독자의 아내들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 남편과 술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아주 적당히 남편에게 술을 제공한다. 그래 놓고 끊으라고 강요하고, 또 알코올중독자가 마시지 못해 죽을 것만 같으면 또 술을 공급한다. 이런 모순적 행위가 끊임 없이 반복된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덧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술을 끊어주기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다. 생존 목적이 남편 살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술과의 전쟁에 올인한다. 그래서 남편이 술로 죽을 것만 같으면 끊어주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자신에게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박탈감에 사로잡힌다. 사는 목적이 남펀의 술을 끊어주는 데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자 할 일 뿐만 아니라 사는 목적까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는 목적을 다시 찾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술을 먹인다. 그래야 자신에게 할 일이 생기게 되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남편이 술을 마시면 끊어주는 데 주력하고, 남편이 술을 끊으면 할 일이 없어지니까 술을 먹이고. 남편은 잘 도와주면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은 나쁜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자신의 뇌리에 깊게 뿌리를 박는다. 도우려는 중독이 고착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의 삶의 목적이 남편의 술 끊어주는 데 있었는데 그 남편이 술을 끊는다. 그러면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즐거워할까? 그런데 그녀는 즐겁지 않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망한 생각이 그녀를 지배한다. 그녀의 삶의 목적은 남편의 단주에 있었는데, 그것에 모든 것을 올인하였는데 막상 그것이 이루어지자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한다. 이런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이 술을 끊지 못하도록 적당한 순간에 술을 먹여 자기가 도울 일을 만든다. 그래야 할 일(도울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편의 술로 고생하던 여자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하여 혼자가 되어 살아가다가 재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술에 학을 땐 여자가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재혼의 상대가 지독한 술꾼이거나 알코올중독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코올중독자의 아내도 도우려는 중독증으로 알코올중독자에게 의존한다. 이것이 공동의존이다.
이런 공동의존의 개념이 새로운 것이고, 아직도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된 합리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단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1989년 Johnson Institute 후원으로 열린 <약물 의존과 가족>이라는 세미나에서 공동의존을 “알코올이 존재하던 아니하던 간에 윗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정서적 상처와 스트레스 행동들이 경험되어지는 가족 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배워진 일련의 비적응적이고 강박적인 행동들”이라고 정의하였다.
Earnie Larsen은 “공동의존이란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활하지 못한 결과로 발생하는 성격적 문제나 배워진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다.”라고 하였다.
공동의존 치료와 개념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사회사업가 Sharon Wegscheider Cruse는 공동의존자를 “첫째 알코올중독과 결혼한 관계 또는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며,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알코올중독 부모나 조부모를 가졌고, 또는 정서적으로 억압된 가정에서 자린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그녀는 <Co-dependency, An Emerging issue>라는 에세이에서 공동의존을 “알코올중독 가장의 모든 구성원들 내에서 발생하는 일차적인 질병이라고 보았다.
공동의존과 ACOA 치료의 전문가인 Robert Subby는 공동의존이 ”일련의 가혹한 규칙과 실제 생활에 개인이 장시간 노출된 결과로써 발달된 감정적이며 심리적이며 행동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하였다.
Melody Beattie는 ”공동의존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며, 남의 행동을 조절하려는 강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였다.
이러한 정의들로 비추어 볼 때 앞에서 소개한 증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공동의존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배워진 오늘날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동의존은 병인가? 일부 전문가들은 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다른 전문가들은 공동의존을 만성적이고, 진행적인 질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공동의존자들이 건전치 않은 방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병든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원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동의존을 병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많은 공동의존자들이 알코올중독과 같은 질병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공동의존이 진행적이기 때문이다. 공동의존을 병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공동의존의 행동들이 습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공동의존자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 낮은 자신감
* 부정직성
* 조절
* 혼돈
* 완벽주의
* 공포
* 엄격성
* 판단주의
* 열등감과 허풍
* 자기중심적
* 낮은 의사 소통 기술
* 부정주의
* 건강한 방법으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다. (냉담한 느낌들, 왜곡된 느낌들, 원한 같은 감정들을 가슴에 담아 놓는다)
* 사고 장애들(자기중심적이고, 혼돈된 생각, 강박적인 생각,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을 못 함, 이중적인 생각)
* 개인적인 도덕성의 상실(타협적인 가치 체계, 영혼성의 상 실)
알코올중독이라는 병을 알코올의존이라고 정의한다. 술 없이 살 수 없게 사람, 알코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을 알코올의존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가족 역시 공동의존자라고 한다. 왜 그럴까? 간단하고 쉽게 설명한다. 공동의존증을 <도우려는 중독>이라고 한다. 무엇을 도우려고 하다 그것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6순 노모가 계셨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실제 사건이다. 그녀는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인 아들을 힘겹게 길러왔다. 아들이 성년이 되고 자기 앞을 가릴 만큼 성장하자 이웃의 소개로 성정이 곱고 참한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다. 며느리는 남편에게는 물론 시어머니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게 사이좋던 고부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시어머니는 젊은 부부가 한 이불속에서 자는 것마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잠자리까지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들 부부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아들 방문 앞 쪽마루에 앉아 헛기침을 콩콩 해대며 새벽까지 잠자리를 방해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예뻐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며느리가 왜 그렇게 미워졌을까? 답은 하나, 노모는 도우려는 중독증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유복자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 남편 대신 유복자 아들과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중심에는 오직 그 아들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어린 아들은 금방 죽을 것만 같았고 자신이 없으면 아들은 살 수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삶은 온통 아들을 위한 삶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아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맞이하자 그녀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의 목적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숫물을 준비해 주고 얼굴을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수건을 건내 주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출근복을 입혀 주고, 퇴근하면 저녁 식사는 자신의 식성은 무시하고 아들 입맛에 맞추어 저녁상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 때 이부자리를 펴주고, 겨울이면 방바닥이 알맞게 더워졌나 요 밑에 손을 넣어 온기를 확인하는 등 그녀의 삶은 온통 아들을 돌보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일을 며느리가 대신하자 삶의 목적까지 사라진 것이었다.
아들을 위해 할 일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그녀는 이제 삶의 목적과 보람마저 허망하게 사라진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자 이제 며느리는 사랑하는 아들의 반려가 아니라 어머니인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원수가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모는 도우려는 중독증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도우려는 중독증의 증상은 알코올중독자들의 아내에게서도 나타난다. 내가 만난 두 친구는 절친으로 두 사람 모두 알코올중독자였다. 한 친구는 경동시장에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술 문제를 인지하고 내가 진행하던 회복 프로그램에 열심히 어렵게 단주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친구는 아직도 자신의 술 문제를 부인하며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술로 생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 친구는 아내가 알바로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친구가 그들 부부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같이 생활하며 술을 끊도록 도우려 했다.
그렇다고 생활을 접고 그들에게만 매달릴 수 없어 친구의 아내에게 신신부탁을 하고 가게로 출근했다. 절대 집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또 절대 술을 먹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하라고,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자기도 더 이상 도울 수 없으니까 자기 집에서 나갈 각오를 하라고 엄포까지 놓고.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고 출근한 그는 집에서 가져올 물건이 있어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막 대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친구의 아내를 문 앞에서 맞닥뜨렸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황급히 치마 속에 감추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친구는 치마 속에 감춘 물건을 빼앗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술병이었다. 화가 머릿끝까지 치밀어오른 그는 친구의 아내를 호되게 질책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나도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는데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당신 남편을 그래도 친구라고 도와주려고 내 집에 잠시나마 같이 살게 하고, 그렇게 술을 못 먹게 하라고 당부했는데 직접 술까지 사다 주다니 이렇게 배신해도 되느냐?”고
친구의 아내가 울며 대답했다. 한 잔만 먹게 해달라고, 못 먹으면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딱 한 잔만 먹게 해달라고 울며 애원하는데 불쌍해서 어떡하는냐고.
친구의 아내도 남편이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술을 못 끊고 계속 마시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아보고, 실제 가출도 해보고, 울며불며 통사정도 해보고, 이도저도 안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도 시켜보았다. 그런 그녀가 알코올중독자 남편의 통사정에 자발적으로 술을 사다 먹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이런 현상은 중독자 가족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도우려는 중독증의 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예로 든 노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유형의 아내들은 자기가 돕지 않으면(도와서 술을 끊어주지 않으면) 남편은 곧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정신적 에너지도, 신체적 에너지 모두를 남편의 단주에 올인한다. 몰래 감추어 놓은 술을 수색하여 찾아내어 쏟아버리고, 술을 사지 못하게 집안에 돈의 씨를 말리고, 동네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외상 주지 말라 애원하고, 정신병원의 강제 입원도 수도 없이 반복하고. 그러나 이런 행동이 철저한 것은 아니다. 아이로니칼하게도 중독자의 아내들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 남편과 술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아주 적당히 남편에게 술을 제공한다. 그래 놓고 끊으라고 강요하고, 또 알코올중독자가 마시지 못해 죽을 것만 같으면 또 술을 공급한다. 이런 모순적 행위가 끊임 없이 반복된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덧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술을 끊어주기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다. 생존 목적이 남편 살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술과의 전쟁에 올인한다. 그래서 남편이 술로 죽을 것만 같으면 끊어주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자신에게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박탈감에 사로잡힌다. 사는 목적이 남펀의 술을 끊어주는 데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자 할 일 뿐만 아니라 사는 목적까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는 목적을 다시 찾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술을 먹인다. 그래야 자신에게 할 일이 생기게 되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남편이 술을 마시면 끊어주는 데 주력하고, 남편이 술을 끊으면 할 일이 없어지니까 술을 먹이고. 남편은 잘 도와주면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은 나쁜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자신의 뇌리에 깊게 뿌리를 박는다. 도우려는 중독이 고착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의 삶의 목적이 남편의 술 끊어주는 데 있었는데 그 남편이 술을 끊는다. 그러면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즐거워할까? 그런데 그녀는 즐겁지 않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망한 생각이 그녀를 지배한다. 그녀의 삶의 목적은 남편의 단주에 있었는데, 그것에 모든 것을 올인하였는데 막상 그것이 이루어지자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한다. 이런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이 술을 끊지 못하도록 적당한 순간에 술을 먹여 자기가 도울 일을 만든다. 그래야 할 일(도울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편의 술로 고생하던 여자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하여 혼자가 되어 살아가다가 재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술에 학을 땐 여자가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재혼의 상대가 지독한 술꾼이거나 알코올중독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코올중독자의 아내도 도우려는 중독증으로 알코올중독자에게 의존한다. 이것이 공동의존이다.
이런 공동의존의 개념이 새로운 것이고, 아직도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된 합리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단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1989년 Johnson Institute 후원으로 열린 <약물 의존과 가족>이라는 세미나에서 공동의존을 “알코올이 존재하던 아니하던 간에 윗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정서적 상처와 스트레스 행동들이 경험되어지는 가족 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배워진 일련의 비적응적이고 강박적인 행동들”이라고 정의하였다.
Earnie Larsen은 “공동의존이란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활하지 못한 결과로 발생하는 성격적 문제나 배워진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다.”라고 하였다.
공동의존 치료와 개념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사회사업가 Sharon Wegscheider Cruse는 공동의존자를 “첫째 알코올중독과 결혼한 관계 또는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며,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알코올중독 부모나 조부모를 가졌고, 또는 정서적으로 억압된 가정에서 자린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그녀는 <Co-dependency, An Emerging issue>라는 에세이에서 공동의존을 “알코올중독 가장의 모든 구성원들 내에서 발생하는 일차적인 질병이라고 보았다.
공동의존과 ACOA 치료의 전문가인 Robert Subby는 공동의존이 ”일련의 가혹한 규칙과 실제 생활에 개인이 장시간 노출된 결과로써 발달된 감정적이며 심리적이며 행동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하였다.
Melody Beattie는 ”공동의존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며, 남의 행동을 조절하려는 강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였다.
이러한 정의들로 비추어 볼 때 앞에서 소개한 증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공동의존자들은 생존을 위하여 배워진 오늘날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동의존은 병인가? 일부 전문가들은 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다른 전문가들은 공동의존을 만성적이고, 진행적인 질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공동의존자들이 건전치 않은 방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병든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원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동의존을 병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많은 공동의존자들이 알코올중독과 같은 질병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공동의존이 진행적이기 때문이다. 공동의존을 병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공동의존의 행동들이 습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공동의존자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 낮은 자신감
* 부정직성
* 조절
* 혼돈
* 완벽주의
* 공포
* 엄격성
* 판단주의
* 열등감과 허풍
* 자기중심적
* 낮은 의사 소통 기술
* 부정주의
* 건강한 방법으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다. (냉담한 느낌들, 왜곡된 느낌들, 원한 같은 감정들을 가슴에 담아 놓는다)
* 사고 장애들(자기중심적이고, 혼돈된 생각, 강박적인 생각,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을 못 함, 이중적인 생각)
* 개인적인 도덕성의 상실(타협적인 가치 체계, 영혼성의 상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