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치유 길라잡이

제63회 개방이냐 격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관리자
20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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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중독자는 왜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가? 소위 전문기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사회에는 술이 있고,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알코올중독자는 어느 누구도 술을 못 마시게 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술을 구할 수 없는 곳에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악명 높던 남양정신병원 등 알코올중독 치료기관들이 인가를 피해 한적한 곳에 둥지를 틀던 시절이 있었다. 그 병원은 근래에 공포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술을 제조 판매해 많은 수익을 올린 주류업자들이 과도한 음주로 많은 알코올중독자들이 양산되자 비판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그들의 이익단체인 주류공업협회에서 당시 400억이라는 거금을 출자하여 여의도에 한국음주문화연구센타를 설립하였다. 협회는 유관기관인 세무기관의 퇴직자들의 친목단체인 세우회가 설립한 여의도의 세우회관의 4층 전층을 임대하여 알코올 문제 관련 학술 연구 조사, 알코올 문제 예방 홍보, 알코올중독 치료 재활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산으로 옮겨가 치료기관인 알코올중독 전문 정신병원까지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시작한 한국음주문화연구센타는 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임원 대부분이 퇴직 세무공무원 출신이었다. 그들의 전문 분야는 금주와는 상반되 것이 아닌가? 주류공업협회는 술을 팔아야 수익이 발생하는 업자들의 이익단체인데, 이곳에서 하는 일은 술을 적당히 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술을 끊으라는 것에 치중하는 것처럼 비추어지자 결국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 서울 대교구로 운영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설립한 카프알코올전문병원 외에 부설 치료기관이 서울에 두 곳이 있다. 모두 다 주택가에 있는 시설로 남성 전용 시설과 여성 전용 시설로, 그곳에 자리를 잡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격리하지 않은 개방 시설을 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가에 설치한다는 것은 중독자들이 언제든지 술을 마실 수 있게 음주를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극렬 반대했다. 또한 주민의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오랜 설득으로 두 곳에 남성 시설인 감나무집과 여성 시설인 향나무집이 자리를 잡고 치료와 재활 사업을 시작하면서 많은 중독자들이 회복하기 시작했다.

군대라는 특수 집단이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주면 이등병 짓을 하고, 못 배운 사람이라도 상병이나 병장 계급장을 달아주면 그 계급에 걸맞는 행동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군이라는 제복과 계급 사회라는 특수성 때문이 아닐까?

예비군 훈련에 나타나는 특이한 3개 증상이 있다. 정신교육 시간이면 모두 하나같이 꼬박꼬박 졸고, 군화끈을 풀어 헤치고 질질 끌며 걸어다니고, 쉬는 시간이면 모여 앉아 동전으로 짤짤이를 한다. 사회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회사 사장도 의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모두 똑같은 짓을 한다. 이것도 제복의 영향이 아닐까?

정신병동도 이와 유사하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도 환의를 입혀놓으면 다 똑같은 환자가 된다. 입원하면 제일 먼저 환의로 변복한다. 그리고 병원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엄한 규칙에 순종하여야 한다. 일반 병실의 환자가 아니라 술에 취해 살아온 알코올중독자들은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인간 망나니 취급을 받는다. 그리하여 간호사들을 보조하는 보호사들도 젊고 힘깨나 쓰는 무술 유단자들을 선호했다. 그리하여 군대와 같은 계급이 저절로 생겨났다. 군대와 같이 짬밥이라고 해서 입원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그래서 병실마다 또 병원마다 대장이 있다. 그들이 법이다.

창문마다 설치된 철창의 폐쇄성, 그리고 군대보다 엄혹한 억압 등으로 그들의 의식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담도, 교육도 없는 상태에서 원장에게 잘 보여야 퇴원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지한 환자들은 회진 시간이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저는 알코올중독자입니다. 퇴원하면 꼭 술 끊겠습니다.“ 하고 앵무새같이 되뇌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다른 소리를 한다. 보호자가 면회를 오면 잘못했노라고, 퇴원만 시켜주면 다시는 술 안 먹고, 새사람이 되겠다고 빌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면 애걸도 한다. 이런 사실을 원장에게 이야기하면 원장들의 답은 한결같다. 아직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일반 질병의 경우는 완치를 장담하며 의사가 퇴원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병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언제든지 재발이 가능한 질병의 특성 때문에 완치 판정을 할 수 없는 특성도 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알코올중독자의 이런 약속에 속아 왔던가? 그래서 환자가 퇴원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하고 병원 치료비를 준비해 와서 다음 주에 퇴원시키겠다고 약속한다. 그 약속은 지켜질 리 만무한다. 그래서 환자들 사이에는 퇴원 보따리 열두 번도 더 싸야 퇴원하다는 이야기가 성행한다. 그래서 환자는 독이 올라 말한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결심했을 때 퇴원시켰으면 술을 딱 끊을 텐데, 내 말을 무시해? 이제는 나가면 바로 술을 먹을 거야 하고 분노에 떤다. 이런 환자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는 의사는 말한다. 기분 좋으면 술을 끊고, 기분 나쁘면 술을 마시겠다는 사람이 어떻게 술을 끊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도 기분 상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끝없는 재발에 지친 환자 보호자는 나중에 환자의 회복에는 관심조차 없어진다. 그리하여 어디 깊숙한 외진 곳의 격리시설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치료가 되면 더 좋고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말썽 많고 골치덩이인 남편이 집에서 없어만 주면 만족이다.

그리하여 한때 금주기도원의 비리와 폭력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에 보도되어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놀라운 일들이 발생했다. 그런 보도를 한 방송국에 전화가 빗발쳤다고 보도를 한 담당 PD가 나중에 나에게 말했다. 그곳에 어디냐고. 자기 남편을 그곳에 보내겠다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그런 곳에 사랑하는 가족을 어떻게 보내겠느냐는 물음에 그들은 대답했다. 내 남편과 같은 사람과 일 년만 같이 살아보라고, 그러면 우리의 사정을 충분히 알 것이라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 환자의 마음에는 피해망상과 분노와 원망이 쌓이기 시작한다. 정직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술을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해 온 단주자들의 교훈과 배치되는 치료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병원과 금주기도원 생활을 경험한 나는 알코올중독 치료에는 교육이 최선의 방법이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하여 폐쇄가 아닌 개방된 시설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잡혀가던 기도원, 강의를 요구했던 기도원 원장, 그 강의로 환자가 푹발적으로 증가하여 부자 기도원이 되어서, 다른 요구는 다 들어주어도 개방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개방하면 환자들이 다 도망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방 시설 찾기가 시작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W산 금식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그곳은 다른 금주기도원과는 달리 개방된 상태에서 적은 수의 알코올중독자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상담 결과 일주일에 2시간씩 치료 교육을 하기로 결정했다. 알코올중독 치료는 교육밖에 없다는 것이 의학계의 정설인데, 그런 이론은 거의 무시된 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W산은 유명한 등산코스가 있어 주말이면 서울의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주차관리인이라는 완장을 스스로 만들어 차고 등산객들이 차를 주차하면 무료주차장임도 불구하고 달려가 주차비를 받아냈다.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시행되는 예배 시간에 술에 취한 채 예배당에 들어와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원장 목사는 알코올중독자의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환자들이 제공하는 식비조의 돈 몇십만 원이 필요할 뿐이었다. 환자가 입소하면 3개월치의 식비를 선불로 입금해야 했다. 사정이 있어 1개월만에 퇴원해도 남은 2개월치의 식비를 환급해 주지 않았다. 예금한 것으로 알고 다시 마시고 재입원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2주차 강의가 끝났을 때 원장 목사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수고스럽게 올 필요 없이 환자만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환자 한 명단 얼마씩 소개비로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로 나는 그곳과 연을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원장 목사가 술에 만취된 환자를 폭행해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의 봉사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가자 여기저기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도원은 물론 병원에서도 치료 교육을 요청했다. 충청도 C시의 기도원에서도 치료 교육을 요청했다. 물론 개방된 기도원이었다. 다른 것을 볼 것도 없이 개방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려 주 2일 하루 두 사간씩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니 그곳의 원장은 여전도사였는데 알고보니 천사병 환자였다. 가족을 물론 일기 친척들의 돈을 빼앗아 남에게 퍼주기를 즐겼다. 가끔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부흥 집회를 열었는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시가 5만 원 상당의 벌꿀을 안겨주어 찬사를 받았다. 특히 사(師)자가 붙은 사람들에게 섬김은 지나칠 정도였다. 수용된 환자들에게는 제빵공장에서 생산된 빵 중에서 판매가 불가능한 파치 빵을 푸드 뱅크를 통해 얻어다가 일인당 빵 두 개에 어묵 국물 한 사발씩 한끼의 식사로 주었다. 그리고 기도원을 방문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님들에게는 쇠고기며 삼겹살을 굽고, 지지고 볶아 기도원 경내에 고기 냄새가 진동하게 했다.

아무리 천대받는 알코올중독자들이지만 얼마나 먹고 싶을까 생각하니 울화 치밀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연을 끊고 싶었지만 나마저 안 가면 그들을 할 일 없이 공허하게 할렐루야 아멘만 외치다 인생을 마감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 주 방문할 때는 자비를 들여 환자 한 사람당 백숙 한 마리씩 먹을 수 있게 생닭을 사간 일도 있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가끔 병천으로 환자들은 데리고 가 그 유명한 병천순대를 대접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환자는 순대 맛을 보자 술 생각이 간절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만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말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게 격리가 아닌 치료기관을 찾아 유랑했지만 그런 곳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곳 개방된 금주학교를 표방한 곳이 있었다. 그곳도 금주기도원의 폐해가 언론을 통해 확산되어 가던 시기와 맞물려 언론사의 함정 취재로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극소수의 장신병원에서는 환자 유치 차원에서 병실 일부만 개방하는 곳도 있으나 치료 메뉴얼조차 없어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정신병원의 사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C시에 있는 정신병원은 단시일에 폭발적으로 성장을 이룬 곳이었다. 그곳 원장의 경영 방식은 특이했다. 서울의 정신병원 페이닥터 시절 환자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는 것으로 환자들의 환심을 샀다. 다른 의사들과의 상담에서 거의 불가능한 외출 외박도 그 원장에게 부탁하면 프리패스였다고 그 당신 환자들이 술회했다.

그렇게 환자들과 친밀해진 원장은 C시에 정신병원을 개원했다. 미쳐 건물이 완공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전 병원에서 치료받던 환자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건축을 도왔다. 물론 병실은 개방이었다. 물론 음주 사고는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신 환자는 패쇄 병동에서 3일 정도만 격리되어 술이 깨면 다시 개방병동으로 복귀했다. 이런 소문이 전염병처럼 확산되자 그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자의 입원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래도 시 외곽에 위치한 공간에 여유가 있는 병원이나 할 수 있다. 대부분이 정신병원은 알코올중독 치료의 어려움으로 알코올중독자는 기피 환자로 진료를 거부하고. 또 수익을 위해 일반 정신질환도 함께 진료할 수밖에 없으므로 시내 상업 지역에 위치한 병원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이 제도권에 있는 알코올중독 치료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소규모 개방기도원에서 3개월 정도 강의를 했을 때였다. 환자들의 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음주 사고 잦았다. 그러나 열심히 프로그램을 따라오는 환자들이 모습에 회복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기도원 원장과 협의하여 시험삼아 가족과 협의하고 10명의 환자를 2박3일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휴가 기간이 끝나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과연 몇 명이나 마시지 않고 돌아올까? 또 그냥 집에 눌려 앉아 귀소를 거부하는 환자는 얼마일까? 그들이 마시지만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휴가가 끝나고 놀랍게도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전원이 귀소한 것이 아닌가? 절반만 돌아와도 대성공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다른 기관에 이야기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거짓으로 매도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최선의 치료는 개방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안타깝다.

지금도 여전히 알코올중독자 치료는 격리해야만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환자의 인권이 보호되고 효과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는 치료 시스템이 어서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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