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치유 길라잡이

중독 단상 5 가요 칠갑산과 미당의 시 문둥이

관리자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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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병선의 <칠갑산>이란 노래를 처음 접한 곳은 마포의 병원에서였다. 알코올중독 치료 프로그램의 하나로 1주일에 한 시간씩 오락 시간이 주어졌다. 오락 시간에 필요한 경비는 1주일에 한 번씩 허락된 면회를 한 환자들이 보호자로부터 받은 용돈 중 일부(교도소에서는 그것을 영치금이라고 한다나. 하여튼 그런 개념의 돈이다), 5천 원이든 1만 원이든 총무에게 납부하면 모아둔 그 돈으로 과자나 빵 등 간식과 음료 등을 구입하고. 그것을 먹고 마시며 술 없이 즐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면회란 용어는 잘못된 용어지만 지금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면회란 일반인이 출입이 제한된 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족, 친구, 연인 등 외부인이 만나보는 것을 말한다. 교도소의 경우 접견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는 환자의 경우 면회가 아닌 병문안을 해야 한다. 문병 또는 병문안이란 앓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병세를 알아보고 위로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는 환자를 만나는 일은 서슴없이 마치 죄를 짓고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는 죄수를 찾아가는 것 같이 면회라 부른다.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는 절대 문병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한사코 면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것을 아주 당연시한다. 이런 서글픈 현실에 괴로워하는 환자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듯 면회란 용어를 마구 사용한다.

오락 시간에 되면 환자들 모두 병원 로비에 모여 술 없는 억지춘향식 놀이를 시작한다. 순서 없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음정도 박자도 무시한 노래를 고래고래 목이 터져라 부르는가 하면 쿵쾅대는 탬포가 빠른 음악이 카세트에서 흘러나오고, 환자들은 음정 박자는 물론 멜로디까지 무시하고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은 춤이 아니라 한과 분노가 폭발하는 광란의 굿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 시간의 오락 시간을 보내고 병실로 돌아오면 그 광란의 춤판으로 원한과 분노 그리고 병원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시원하게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허탈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병상에 널브러졌다.

그런 오락 시간에 만난 노래가 주병선의 <칠갑산>이었다. 40 후반으로 보이는 깡마른 체구의 환자가 노래를 시작했다. 평소 술만 즐겼지,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살던 나에게 그의 노래 칠갑산은 나의 가슴을 움켜쥐고 영혼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칠갑산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 홀로 두고 첩첩 산골 칠갑산을 떠나 시집가야 하는 어린 새색시의 아린 마음, 타는 속을 구절구절 쏟아내는 가사도 메마른 감정에 슬픈 소낙비를 퍼부었지만, 그보다 더 병든 가슴을 후벼판 것은 그의 한이 맺힌 애절한 목소리였다.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고, 마치 찢어질 듯 토해내는 그의 절규는 듣는 우리 알코올중독자들의 가슴을 뒤흔들다 못해 먹먹하게 했다. 우리들을 그의 노래에 마치 커다란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거대한 충격에 휩싸여 입을 벌린 채 슬픔과 한에 찌든 그의 검고 깡마른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우리는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정적에서 박수도 잊고 있었다.

치료 프로그램 중 <나는 왜 술을 마셨나?>라는 과제가 있었다. 10개의 답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환자가 보는 앞에서 읽고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그 열 개의 답변 중 술이 좋아서 마시고 싶어서 마셨다는 답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답은 누구 때문에, 또 무엇 때문에 마셨다는 것이었다. 물론 알코올중독자들의 4대 강박증과 본능적 방어기제 때문이긴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음주 책임을 자신의 책임이 아닌 남의 탓으로 떠넘겼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지고, 중독자가 아닌 술을 단순히 좋아하고, 다른 술꾼들보다 조금 더 마셨을 뿐인데 이렇게 억울하게 정신병자로 몰아 형무소보다 더 악질적인 병원에 가두어 놓고 생고생을 시킨다는 분노와 원한을 누가 어떻게 풀어준단 말인가?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또 금주기도원에서 퇴원한 환자들이 보복 차원에서 자신을 입원시킨 아내를 정신질환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다. 그렇게 원한과 분노가 켜켜이 쌓인 우리들의 한을 그가 대신 토해낸 것일까?

세월이 가고 요즘 들어 트로트라는 장르의 가요가 온갖 매스컴을 점령하고 있다. 경쾌하고 흥이 절로 나는 즐거운 노래도 있지만 때로는 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6, 25 전란 시대의 소용돌이에 고통받던 시대의 질곡과 보릿고개 시절의 어머니 아버지의 자식을 위한 노고를 애절하게 되새기는 노래가 우리 노년층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그럴 때 가끔 나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문둥이>를 떠올린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처절하고 비통한 어조로 토해내는 천형에 대한 고뇌의 몸부림.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 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회와 격리한다. 사회에는 어디에나 술이 있으니까. 그러나 알코올중독자는 자신들은 중독자가 아니고, 술을 즐기는 애주가인데 왜 이렇게 억울하게 정신병동에 갇혀 또라이 취급을 받아야 하나? 돈을 내고 치료받는 환자가 아닌 마치 범죄자 대접을 받는 정신병원의 부조리, 어버지뻘의 환자에게 개새끼야, 아니꼽고 더러우면 안 마시고 안 오면 될 것 아니야 하는 폭언에 눈물을 쏟던 그 아픔, 그래서 그들 나병환자와 알코올중독자들은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것이 아닐까?

문둥이는 전해 내려오는 잘못된 민속 치료법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인간이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 그것도 약하디약한 어린아이의 생간을 자신만이 살기 위해 초승달이 떠오르는 어느 날 밤 인적인 끊긴 남도의 어느 보리밭에서 아이의 간을 뽑아 먹는다. 인간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문둥이는 한을 풀기 위해, 또 살기 위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서러워 처절하고 비통하게 운다. 꽃처럼 붉은 울음을. 그러나 나는 이 울음이 꽃처럼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울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피를 토하는 울음, 그 슬픔, 그 한, 그 분노는 남이 아닌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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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교역자 : 맹경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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