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치유 길라잡이

중독 단상 6 잘못된 신뢰

관리자
202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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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그의 저의를 의심한다. 혹시 이 사람이 사기꾼은 아닌가 하고.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망 속에 들어가 살 수밖에 없다. 이 인간 관계망 속에 들어가 함께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선득 믿는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특히 어린아이를 좋아하셨다. 사람들 모두가 귀여움과 천진난만함 때문에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예수님도 그런 이유로 어린아이를 좋아하셨을까? 그것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A,A,에서는 12단계 중 제1단계를 겸손 단계라고 가르친다. 여기에서의 겸손은 세상의 겸손과는 차원이 다르다. 흔히들 겸손이라면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버리고 낮은 데 처하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그런데 A,A,의 겸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을 아주 낮은 곳까지 그리고 아주 비참한 곳까지 내린다. 알코올중독이라는 병은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도움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이고, 또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임으로 알코올중독자는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자신을 낮춘다. 자기 능력으로는 물론 어느 누구의 도움으로도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되면 한번 태어난 목숨 그냥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비참하게 죽을 수는 없다.

미국 체로키 인디안 사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사람들은 기뻐했다. 우리가 죽을 때 사람들이 슬퍼하기를.

알코올중독자가 죽을 때 정말 사람들이 슬퍼할까? 아니면 기뻐할까? 알코올중독자가 죽을 때, 사람들은 그 자식 그렇게 속 썩이더니 정말 잘 죽었다고 손뼉치지 않을까. 그렇게 비참하게 살 수 없으니까 살기 위해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 위대한 힘인 신을 믿으라는 것이다. 만약 무신론자거나 불가지론자 또는 회의론자라 할지라도 살기 위해 없는 신이라도 있다고 믿고 의지하라고 가르친다.

그 겸손의 대표적 존재가 어린아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낳고 양육하는 부모를 티끌만치도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의존한다. 그들은 아빠나 엄마가 공중 높이 던져 올려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엄마나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까르르 웃기까지 한다.

A.A.는 이렇게 겸손에 이르면 살기 위해 신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자신이 믿는 절대적 존재인 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알코올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중독자의 믿음을 어떠한가? 중독자는 중독을 통해 얻은 변화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에 중독됨으로써 일정하고 예측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중독의 유혹적인 면이다.

중독자는 중독 효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중독자는 중독이 주는 기분의 변화에 의존하며 처음에는 정말로 기분이 변화된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나 사람에게 기분을 변화시켜 준다는 보장이 없다. 중독자가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싶어서 제일 친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 친구의 도움은 전혀 효과가 없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내 도움이 필요한 일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중독자는 사람보다 물질을 더 믿을만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사람이 아닌 중독을 신뢰한다. 중독자는 자기가 가장 먼저이기를 원하고 요구한다. 그들의 욕구는 모든 것을 제치고 가장 중요해진다. 그리하여 그들의 성격은 자기중심적으로 변한다. 사람들 모두 욕구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구도 돌보지만 남의 욕구도 돌본다.

어떤 남자에게 예기치 않게 목돈이 생겼다. 이 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한다. 아내에게 맡기는 것도 좋으나 한번 그 주머니에 들어가면 다시 타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모든 남편들은 다들 알고 있다. 아들 녀석은 최신형 휴대폰으로 바뀌어달라고 벌써부터 생떼를 쓰고 있다. 아직 중학생인 딸년은 쌍꺼풀 수술이 소원이다. 아내는 계절이 바뀌어도 변변한 외출복이 없다고 투덜댄다.

나도 비상금이 필요하다. 이 돈을 숨겨두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찾아 쓸까? 대부분의 가장은 자기의 욕구는 뒤로 미루고 아내와 아들, 딸의 욕구부터 들어준다. 이것이 사람 살아가는 방법이고 지혜다. 그러나 중독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자신의 욕구 충족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타인의 욕구는 돌보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가족의 욕구는 전혀 돌보지 않고 그 돈을 자신의 중독 욕구에 쏟아붓는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적 에너지까지도 중독 욕구 충족에 받친다.

물질은 자기의 욕구나 필요라는 것을 내세울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물질과의 관계에서 중독자가 언제나 우선이다. 이러한 특성은 중독자에게는 아주 매력적이며 정서적 논리에 따르는 신념 체계와도 잘 맞아들어간다. 이제 중독에 빠진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중독을 신뢰하게 된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중독 과정에 위협이 된다. 중독자에게는 물질이 우선이고, 사람은 그 다음이다.

초기 단계에서 중독은 자신을 정서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시도다. 많은 의미에서 중독은 정상적인 관계가 뒤틀려 버린 상황이다. 대부분의 우정이 정서적 애착에서 시작되며 정서적인 욕구의 충족에 기초하였지만 중독은 병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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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교역자 : 맹경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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